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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디게니스 아크리티스

디게니스 아크리테스 발췌 번역 (完) : 영웅이 아닌 영웅으로 죽다.

이전화에서 막시모와 정사를 나누었던 디게니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판본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판본은 막시밀리아(막시모)와 결혼하려 했다가 그녀와 결혼하면 16살에 죽으며 스트라게사(코레)와 결혼하면 36살까지 살 수 있다는 예언을 듣고 막시밀리아를 버린다고 하기도 하지만, 일부 그리스 판본은 더더욱 끔찍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나는 당신이 막시모와 무엇을 했는지 몰라요.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하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알고 있어요,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숨기려 한 죄 또한 용서하시리라는 사실을..’

 

코레는 돌아온 디게니스에게 슬픈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그녀 또한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이 디게니스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코레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아름다운 코레의 슬픈 얼굴을 보자, 디게니스는 자괴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혐오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끝내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에 

 

자신의 죄를 투영한 다른 존재를 혐오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얼마 뒤 디게니스는 코레에게 원정을 떠난다고 속인 뒤 막시모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막시모는 이미 디게니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막시모는 아름다운 들판에 집을 짓고 언젠가 그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디게니스를 맞이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다시금 함께하니, 오늘 하루는 내게 가장 행복한 나날일 거에요.’

 

디게니스는 활달한 막시모에게 사냥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막시모는 금방 채비를 마친 채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숲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숲이 한창 깊은 어둠을 드리우기 시작하자, 디게니스는 배신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디게니스는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그것도 코레조차 가지지 못한 아이를 낳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창녀, 상간녀, 살인자....!’

 

막시모는 예상치 못한 디게니스의 기습에 맹렬히 반격했지만, 가장 건강하던 시절에도 이기지 못했던 남성을 임신한 몸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이럴 거라면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때 살려두었나요...’

 

디게니스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리곤 차가운 한마디를 내밷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계집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두 번이나 살려주신 뒤 당신의 칼에 꿰뚫린 팔을 묶는 것을 도우셨나요.’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몸을 허락했을 때 저의 연약한 여자의 부위를 탐하셨나요...?’

 

디게니스는 대답 없이 막시모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넣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 될 뻔한 이름없는 태아와, 마지막 아마존 여전사는 그렇게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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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디게니스는 그 추악한 배신을 마친 이후 심경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막시모를 죽이고 난 뒤, 마치 모든 것을 잊고싶은마냥 코레와 하루동안 정신없이 행복을 즐깁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천막 생활을 마치고 제국령 시리아 국경의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떠나 그곳에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궁전을 짓고 정착합니다.

 

그가 정착했다는 국경선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궁전이 유프라테스 강변 건너편의 아바스 제국 영토와 이어지는 튼튼한 다리를 포함한 구간에 지어졌으며, 전사 성인인 성 테오도르를 모시는 정교회 성당이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은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경을 잇는 다리가 그의 궁전 안에 있었기에, 아바스인, 이란인, 로마인, 타르수스인 수많은 종족들이 그의 궁전을 찾아와 다리를 건너며 선물을 바쳤고, 때때로 로마 황제나 그 지방의 동로마인 총독또한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종종 아버지 에미르와 어머니를 만나러 아나톨리아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아버지 에미르가 사망하고 난 뒤엔 어머니를 유프라테스로 모셔와 함께 살았습니다.

 

여기서 디게니스의 이상한 성격의 변화가 나오는데, 그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코레 외의 그 누구의 얼굴도 보고싶어하지 않았습니다요리사나 하인, 노예들은 그가 종을 울리면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방을 떠나야 했으며, 그 또한 최소한의 남자 시종만을 거느린 채 대부분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하고는 했습니다. 하인들이나 가신들은 그가 방을 떠난 다음에야 방에 들어가 청소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천막 생활을 하던 도중에도 그는 개인 공간에 코레나 가족 말고 그 누구도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가신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기도 했습니다.)

 

5년 뒤 그의 어머니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자, 그의 아버지 에미르의 후임으로 인근 영토를 차지했던 아랍인들이 평화조약을 깨고 디게니스의 궁전을 습격했으나 그는 금방 격퇴했습니다.

 

23, 혹은 36살이 된 디게니스는 크게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목욕을 하다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습니다. 의사를 불러도 차도가 없자 그는 코레를 불러 마지막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그가 코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를 위해 어떤 용기를 내었는지를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막시모를 임신시켰던 사실과 코레만을 사랑했기에 막시모를 몰래 죽이는 비열한 짓도 마지않았다는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디게니스는 그녀에게 꼭 슬퍼하지 말고 재혼하라고 부탁했으나, 코레는 디게니스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실연의 슬픔으로 그를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유일하게 그를 이긴 존재는 죽음 하나 뿐이었습니다.